스마트 동화
아이 속상해! 말도 못하고!
엄마하고 서울 가는 전철을 탔는데요, 일반 자리는 다 차고 경로석만 한 자리가 비어 있었어요. 엄마는 나를 경로석으로 데려가 앉히고 내 앞에 섰어요.
나는 여섯 살.
경로석 벽에는 그림 넷이 있는데 나 같은 아이가 앉으라는 그림은 없었어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지요.
“엄마, 난 안 앉을 거야.”
“왜?”
“저 그림에 지팡이 할아버지, 부상 아저씨, 배 불뚝 아줌마, 아기 안은 엄마는 있어도 어린이 그림은 없 어.”
“그래도 넌 앉아도 돼. 그냥 앉아 있어.”
나는 엄마 말대로 다시 앉아서 옆 사람을 보았지요. 두 사람이 다 할아버지가 아닌 아저씨였는데 내 바로 옆 아저씨는 스마트폰을 들고 화투를 치고 그 옆 아저씨는 머리를 숙였다 올렸다 하면서 노래를 듣고 있었어요.
전철이 한번 섰을 때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고 이어서 할아버지 한 분이 뒤뚱뒤뚱 들어와 경로석으로 오셨어요. 여든도 넘었을 할아버지는 작은 키에 배가 불룩 튀어나오고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경로석에 젊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누군가가 자리를 내주려니 믿고 다가섰어요. 그러나 아무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지요. 내 옆에 앉은 아저씨가 스마트폰에서 화투를 하고 있었는데 할아버지를 힐끗 보고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어요. 할아버지가 화투하는 사람을 쏘아보면서 일어서라는 말은 못하고 성난 눈으로 이렇게 말했어요.
“젊은이, 거긴 내 자리야, 자리 내주게.”
나는 할아버지 맘을 알아서 할아버지한테 자리를 양보하려고 일어서다가 멈추었어요. 일어서서 손잡이를 잡아야 하는데 키가 작아서 손잡이를 잡을 수가 없지 뭐예요. 그래서 도로 앉아 옆에 아저씨를 향해 속으로 말했지요.
“아저씨, 할아버지 오셨어요. 일어나세요.”
“아저씨, 할아버지 안 보여요?”
아저씨는 할아버지를 살짝 훔쳐보고 화투에 빠져서 꼼짝 않았고 그 옆 아저씨는 갑자기 잠이 든 듯 머리를 숙인 채 눈을 감고 있었어요. 나는 또 속으로만 말했지요.
“아저씨들, 할아버지 자리예요. 일어나세요.”
이 말이 가슴에서 콩콩 나오려고 하는데 입이 안 열렸어요. 용기가 나지 않아요. 그래서 속으로만 외쳤지요.
“아이구 속상해, 아이고 속상해.”
그러면서 할아버지를 올려다보니 할아버지 눈에서 노기 가 흘러나왔어요.
“이봐, 젊은이, 거긴 경로석이야. 늙은이가 안 보이나?”
“괘씸한 것들, 젊은 것들이 경로석에 앉아 화투질이나 하다니. 어른도 모르는 게 사람이냐?”
“야, 이놈아 당장 일어서지 못해!”
이런 소리가 그 눈에서 들려왔어요. 그러면서도 노인은 차마 그 소리를 못하고 차가 흔들릴 때마다 뒤뚱거리는 거예요. 난 가슴으로 소리쳤어요.
“아저씨들 일어나세요, 화투는 집에서 하고요! 아이구 속상해!”
엄마 얼굴을 보았어요. 엄마 얼굴에도 이런 소리가 그려 있었어요.
“이봐요, 젊은이, 이러시면 안 되지요. 경로석을 나라에서 왜 만들었겠어요. 젊은이를 위해 만든 것이 아 니잖아요.”
이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은데 개구리소리 같은 안내방송이 울리는 거예요.
“깨갱 갱갱, 개굴개굴”
난 안내 방송 소리가 싫어요. 비행기나 행사장에 가면 띵동땡! 하고 맑은 소리를 내고 이어서 맑고 분명한 목소리로 하는 소리는 좋은데 개구리 소리로 징징거리는 소리에 안내방송 소리가 겹쳐서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데다 외국어 안내까지 하니까 더 머리가 복잡해요.
할아버지 자리를 젊은 아저씨가 차지하고 내주지 않고 하나는 화투를 치고 하나는 졸고, 이게 뭐예요. 그러다 보니 안내방송 소리마저 개구리 노래가 아니라 개구리 우는 소리로 들리지 뭐예요.
“아이 짜증나! 속상해! 아저씨들이 왜 그래요. 난 커서 아저씨들 같은 사람이 되지 않을 거야. 아이고 속상해!”
이러고 있는데 건너편 자리에서 갑자기 할머니 할아버지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어요. 사람들 틈으로 보았더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앞에 좌석 하나가 났는데 서로 앉으라고 양보하는 소리였어요.
할아버지가 “할머니 앉으세요.”하면 할머니가 “아니에요. 어른이 앉으세요.” 하고 그러면 할아버지가 “할머니보다 제가 튼튼합니다. 그러시지 말고 앉으세요.”
얼마나 듣기 좋아요. 두 노인이 자리 하나를 서로 앉으라고 양보하는데 그 옆자리 아주머니들은 두 노인 구경을 하고 있었어요. 난 속으로 말했지요.
“젊은 아주머니, 노인들이 앉으시게 자리 양보하시면 안 되겠어요?”
아무도 양보하지 않고 있는데 하나 있는 자리에 두 할아버지 할머니가 양보하는 사이에 저쪽에 있던 뚱뚱이 아줌마가 사람들을 비집고 오더니 털썩 앉지 뭐예요.
“아이고 얄미워. 서 있는 노인들 안 보이나!”
이럴 때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기라고 하나요?
아니 아빠가 들려준 이야기가 있어요. 방휼지쟁이라는 말로 조갯살을 빼먹으려고 황새가 부리를 들이밀자 조개가 황새 부리를 꽉 물고, 안 놓아 주자 싸움이 벌어졌는데 지나가던 어부가 웬 떡이냐 하고 둘 다 잡아갔다고, 그런 걸 어부지리라고 들려주신 말이 생각났어요.
뚱뚱이 아줌마는 아무것도 모르고 빈자리만 보고 날름 앉았으니 밉다고 할 수는 없지요. 나는 두 할아버지 할머니가 서로 앉으세요, 하던 말이 백합 향기처럼 가슴에 묻었어요.
수원역에 도착하자 화투 아저씨가 일어나고 모자 쓴 할아버지도 내리셨어요. 그리고 내 옆 빈자리에 쌍꺼풀이 수제비처럼 두꺼운 누나가 털썩 앉았어요. 그 뒤를 이어 바로 내 앞에 배가 불룩한 아줌마가 탔어요. 아줌마는 배를 연신 쓰다듬으며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씻어내고 있었어요.
내가 엄마를 올려다보며 눈으로 말했어요.
“엄마, 저 아줌마 배 좀 봐. 내가 일어설까?”
엄마는 고개를 저으며 내 곁에 앉은 누나를 내려다보면서 눈으로 말했어요.
“아가씨, 여기 임신부가 탔어요. 이 자리는 아가씨 자리가 아니에요. 자리 양보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나 누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스마트 폰만 들여다보았어요. 스마트폰에는 수영복의 여자 사진이 비치고 있었는데 손가락으로 여자 그림을 콕콕 찍으면서 웃었어요. 웃는 얼굴이 예뻐야 하는데 예쁘게 보이지 않았어요.
엄마보다 젊고 배가 불룩한 아줌마는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앞에서 얄밉게 스마트폰만 보는 아가씨한데 이렇게 말하는 눈빛이었어요.
“아가씨, 난 배가 무겁고 힘들어요. 자리 양보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나 눈빛일 뿐 입을 열지 못하고 땀만 빨빨 흘렸지요. 나는 속으로 부르짖었어요.
“아이 속상해! 누나 배 나온 아줌마 안 보여요?”
했지만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그렇게 한참 가다 전철이 영등포역에 도착했을 때 옆자리 누나도 배 불뚝 아줌마도 내렸어요. 천안서 영등포역까지 오는 한 시간 동안 경로석에서 일어난 이야기예요.
그런데 영등포역에서부터 또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생겼어요. 영등포역에서 경로석 앞자리와 내 자리 편 자리가 모두 텅텅 비고 뒤따라 서울 사람들이 줄줄이 탔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경로석 빈자리에 앉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젊은 아저씨, 아줌마, 예쁜 누나, 멋진 형아들이 빽빽이 서서 경로석 빈자리를 두고 아무도 앉지 않는 거예요.
내가 엄마한테 말했어요.
“엄마, 빈자리 많아. 앉아.”
엄마는 고개를 저었어요.
“안 돼, 엄마는 거기 앉을 자격이 없어.”
“자격이 뭐야?”
“빈자리는 저 그림처럼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앉도록 비워 둬야 하는 거야.”
나는 그림들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어요.
“엄마! 할아버지, 환자, 임신부, 아기 안은 엄마만 그려 있어. 그림에 어린이는 나도 자격이 없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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