廣州李(광주이)씨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광주 이씨(廣州李氏)는 남한에 총 33,816가구, 141,83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유래(由來)는 신라17대 내물왕(재위기간 356 ~ 401년)때 내사령(內史令)인 휘 자성(自成)으로 비롯되는데 칠원백(漆原伯)이 되어 성주(城主:성의 주인)의 작위를 세습하였다고 한다. 칠원은 지금의 경남 함안을 말한다.
신라가 망하자 유독 칠원만이 성을 굳게 지켜 절의(節義)를 높이고 항복하지 않으니 고려 태조가 크게 노하여 병력을 증강하고 성을 포위 공격하여 오랜 뒤에야 성을 함락하자 칠원성주(漆原城主)의 일족(一族)을 회안(淮安:지금의 광주<廣州>)에 이주시키고 고을의 역리(驛吏)로 복역하게 하였다.
회안에서 복역한지 몇 대(代)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대로 현재(賢才)가 있었다한다.
고려말에 이르러 실권을 장악한 대인(大人)들이 광주(廣州)의 향리(鄕吏)로 이속(移屬)시켰는데,향리는 과거에 나갈 수 있었으므로 그를 계기로 광주에 세거하던 휘 당(唐)께서 과거에 응시하여 생원(生員)이 되시니 이때부터 광주를 관향으로 하여 생원공이 광주이씨의 시조가 되신다.
생원공에게는 인령(仁齡), 원령(元齡, 후에 집<集>으로 개명), 희령(希齡), 자령(自齡), 천령(天齡)의 오형제를 두셨는데 오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940년 고려태조 23년에 광주(廣州)를 관향으로 하여 광주이씨가 크게 번성케 되었다
광주이씨는 고려태조에 의하여 회안(淮安 : 京畿 廣州)으로 강제 이주된 후 선조 자성(先祖 自成)으로부터의 소목(昭穆)이 실전(失傳)되어 구전(口傳)으로 전해오는 소목은 생약하고 족보를 인용바랍니다.
광복 이후 정묘대동보를 만들 때 까지 후손이 이어진 5개 계파로 나뉘어 족보를 합보(合譜)하지 못하고, 둔촌 후손들은 광주이씨 대종회를 구성하여 둔촌의 아우되는 십운과공(十韻科公) 후손들의 종회와 두 형제의 아버님이신 생원공 휘 당(生員公 諱 唐)을 시조로 하고 둔촌 휘 집(遁村 諱 集)과 십운과공 휘 자령(十韻科公 諱 自齡)을 1대조(一代祖)로 하여 각기 대종회와 십운과공 종회로 종사를 이어가고 있다.
율정공 휘 관의(栗亭公 諱 寬義) 후손들은 1987년 정묘대동보 전 까지는 석탄, 암탄 형제 종회와 함께 한희(漢希)를 1세로 하여 족보(族譜)를 만들고 종사를 이어오다가, 정묘대동보에서 둔촌(遁村)의 4촌이며 율정공의 증조이신 생원공 휘 록생(生員公 諱 祿生)을 1대조(一代祖)로하여 종사를 이어가고 있다.
석탄공 휘 양중(石灘公 諱 養中)의 후손들은 정묘대동보 이후 석탄공종회(石灘公宗會)로 석탄공 휘 양중을 1대조(一代祖)로 하고 상대를 소자출로 하여 종사를 이어가고 있다.
암탄공 휘 양몽(巖灘公 諱 養蒙)의 후손들도 암탄공종회(巖灘公宗會)를 만들어 정묘대동보 이후 암탄공 휘 양몽(巖灘公 諱 養蒙)을 1대조(一代祖)로 하여 종사를 이어가고 있다.
광주이씨는 상대소목(上代昭穆)의 실전(失傳)으로 대종회와 십운과공종회, 석탄공종회, 암탄공종회, 율정공종회가 각기 일대조를 달리하여 족보를 만들어 왔으며 그에 따라 광주이씨는 대종회와 4개 방계종회로 나뉘어 진 것이다.
광주이씨 집거유래(광주시청 홈페이지-소개글)
광주이씨의 시조는 신라때 내사령(內史令)란 벼슬을 지낸 자성이다.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고려 태조에 의해 회안(淮安:지금의 광주)의 호장으로 삼음으로 그 신분상 출세를 못하여 기록이 전연 없다가 고려말에 이르러 등극을 시작하니 이때 본관을 광주로 하게 되었다.
集 遁村 寬義 栗亭 養中 石灘 養蒙 巖灘등 학자와 판관이 배출되어 광주이씨는 둔촌,율정,석탄,암탄의 네 파맥으로 이어오는데 둔촌의 후예들은 지금의 서울시 강동구 둔촌동을 중심으로 옛 광주시 구천면 일대와 성남시에 연고가 많고 초월면 무갑리에는 임진란때 피난을 와서 세거가 시작되어 대쌍령리등에 번창하고 도척면 방도리 등에도 집거한다.
둔촌 집은 고려말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 목은 이색과 친교가 두터워 학문을 같이 닦은 학자로 이름이 높다. 석탄파의 시조 양중도 고려말 판관으로 당시 방원과 가까웠으나 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조의 태종으로 등극하자 사귈자리가 못된다 하여 고덕동에 은신하다 태종이 찾아와 도와줄 것을 청하니 한사코 사양하고 돌려보낸후 후환이 두려워 수리골(지금의 하남시 덕풍2동)에 은둔하고 그의 양몽(암탄)은 광주 원적산 아래(실촌면 이선리)에 은둔하고 일체 벼슬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후손들에게도 부도덕한 조선에서는 벼슬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양중, 양몽의 자손들은 그후 벼슬을 기피하고 생업에만 열중하였다.
지금 강동구의 고덕동의 지명 유래도 이 두형제의 높은 덕에 기인 한것이고 미금시의 왕숙천도 태종과 양중이 밤새 술을 마시며 이야기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인 것은 지금도 전해오는 유명한 얘기이다.
초월면 신월리와 용수리 그리고 실촌면에 거주하는 광주이씨의 석탄자손들은 조선 태종때 수리골, 이선리에서부터 분리되어 분포된 것이다. 둔촌의 묘는 원래 성남시 하대원동에 있고 석탄의 묘는 원래 하남시 덕풍2동에 있었으나 도시개발에 따라 종손 이창희가 초월면 신월리로 이장을 하였고 암탄의 묘는 원적산 아래 실촌면 이선리에 그대로 자리한다.
광주에는 독립 운동가인 이종훈(3.1운동 33인중 1인), 이병승(실촌면 만세운동의 주동자)이 유명하다.
광주이씨 제단(祭壇)
광주이씨 문중에서는 매년 가을에 시제사를 지내고 있으나 선조의 분묘가 여러곳에 산재되어 있어 시제때는 매년 많은 시일이 걸려 여러 가지로 불편함을 느낌은 물론 또한 각 분묘마다 제수를 각기 마련하기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므로 이를 한곳에서 제를 지낼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도척면 방도리 안산 종중소유 임야에 제단을 설단하여 선조의 위패를 한자리에 순서대로 설치하고 한자리에서 한분상분의 제수로써 위패에 따라 차례로 제를 올리도록 마련된 제단으로서 한날 한자리에서 여러 선조의 제를 올리게 되어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제반 비용이 절감되는 한편 宗族이 한자리에 모두 참여 하여 종중제반 사항을 토의할 수 있는 잇점도 있다.
자료출처:광주시청 홈페이지 광주이씨 집거유래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7-9 / 광주이씨대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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