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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철학자

한실25시 2026. 1. 24. 22:29

거리의 철학자

 

버스 정류장에는, 몇 년째 '구두 대학 병원' 이라는 간판이 붙은

구두 수선집이 있었습니다.

 

좁은 공간 안에서 언제나 곱추 아저씨가 열심히 구두를 고치고 있었습니다.

​이제 막 서른을 넘긴 종식이가 처음이 구두 병원에 들른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사회생활을 시작하던 무렵이었습니다.

그 날 저녁,

종식이는 한쪽만 닳아버린 구두 밑창을 갈기 위해구두 병원에

들어 섰습니다.

먼저 온 아가씨가

구두를 고치고있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종식이가 아저씨에게말했습니다.

"아저씨, 이 구두 밑창 좀 갈아주세요."​

"네, 그러죠. 좀 앉으세요."

자리에 앉자마자 종식이가다급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죠? 수선비는 얼만가요?"

아저씨가 대답했습니다.

​"시간은 37분쯤 걸리고 요금은 7천 원입니다.

지금이 7 13분이니까 정확히 7 50분에 끝나겠네요."

종식이는 좀 놀랐습니다.

30분도 아니고, 40분도 아닌 37분이라니..

"37분이라구요?"

​"왜요. 못 믿으시겠어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제가 구두 고친 게 벌써 20년이넘었어요.

척하면 삼천리죠."

​"알았어요."

종식이는 먼저 온 아가씨 옆에 앉아

아저씨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 보았습니다.

계속 지켜보니 신기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우선 아저씨는 구두 고치는 모든 기계를

불편한 자기 몸에 맞춰 개조해서 쓰고 있었습니다.

​구두 뒤축을 가는 회전숫돌은 왼쪽 발 앞에 있는 페달을 밟으면

나오게 되어 있었고, ​못을 박을 때 필요한 쇠받침대는

오른쪽 페달을 밟으면 몸 앞으로나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머리 위에도 끈이 여러 개 달려 있어서

어떤 끈을 잡아 당기면 사포가 내려 오고,

어떤 끈을 잡아 당기면 접착제가담긴 통이 내려오며,

어떤 끈을 잡아 당기면 펜치가내려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종식이가 말을 건넸습니다.

​"아저씨, 어떻게 이런 걸 만들 생각을 다 하셨어요?"

​"일을 하다 보니까 하나씩 아이디어가생겼지요.

그리고 내 몸에 맞게 연장들을 고치는 게 재미있더라구요.

이것도 발명이죠.

남들이 알아주지는 않지만, 뭐 어디 알아줘야만 맛인가요?

내가 즐겁고 편하면 되는 거지."

종식이는 순간 멈칫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아저씨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뭔가 철학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듯 했습니다.

아저씨가 계속 말을 했습니다.

​"내가 편하고 즐거워야 손님들도 즐거워하시죠."

종식이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어쨌든 대학 졸업 후 어렵게 들어간첫 직장은 조그만 여행사였습니다.

"그리고 난 내 일에 만족합니다."

명문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변변한 자격증 하나 없었기 때문에

취직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졸업반 때 열심히 입사원서를 냈지만 번번이 서류심사에서 떨어 졌습니다.

​종식이는 이 때부터 세상에 대한 불만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았습니다.

​월급도 별로 많지 않았고 언제나귀찮은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매일 매일 수없이 쏟아지는 짜증나는 문의 전화,

끝도 없는 서류처리, 출발 하루 전 여행을 취소하는 사람들,

남의 여권 수백 장을 들고 대사관 앞에 줄을 서야 할 때 느껴지는 자괴감,

서로에 대한 배려가 없는 동료들..

이런 것들을 떠올리니 종식이는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구두닦이 아저씨에겐

또 다른 신기한 점들이 많았습니다.

아저씨는 일을 하면서 계속 클래식 음악을틀어놓고 흥얼거렸습니다.

​가끔씩 눈을 지그시 감기도 했고, 머리를 지휘자처럼 흔들기도 했습니다.

'구두 닦는 아저씨와 모차르트' 를떠올리니

도무지 안 어울리는 모습이었습니다.

"클래식 좋아하세요?"

​"왜 내가 클래식 들으니까 이상해요?"

당황한 종식이가 얼버무렸습니다.

​"저도 좋아 하거든요."

아저씨의 풍자적인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클래식은 가사가 없어서 좋아요.

가사가 있는 노래를 들으면 자꾸옛 사연도 떠 오르고,

노래 가사가 다 내 얘기 같고··

그런데 클래식은 가사가 없으니까 곡만 음미 할 수 있잖아요."

종식이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건 그렇네요."

그러고보니 아저씨의 왼편에는 시집 한 권이펼쳐진 채

놓여 있었습니다.

"시도 읽으시네요."

​종식이가 눈이 동그래서 자꾸 물어보자

아저씨는 마치 동생에게 이야기 하듯

말을 슬슬 낮추기 시작했습니다.

​"詩도 좋아하지.

소설은 한 가지를 이야기하기 위해 너무 많은 말을 해.

결국 한 가지 메시지를 위해 사람도 죽이고 헤어지게도 만들고..

하지만 시는 단 한마디로 많은 걸 전해 주잖아."

이쯤되자 종식이는 자기도 모르게

스승 한 명과 이야기를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어 보고 싶은 게 많았습니다.

"돈은 많이 버세요?"

"왜, 자네도 이거 하려고 그러나?

이것도 기업이야. 구두 잘 닦고

친절하게 손님을 대하면돈 버는 거고

, 구두 못 닦고 불친절하면 돈 못 버는 거지."

누구나 아는 얘기지만

뭔가 가슴에 와 닿는 게 있었습니다.

사실 종식이는

한 번도 여행사 일을 자기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친절하게 전화를 받지도 않았고, 한 번 더전화하고 한 번 더 뛰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않았습니다.

  낮에는 대충 일하고 오히려 밤늦게소주잔을 기울이며

회사나 상사를 욕하는 데 더 열심이었습니다.

​9시인 출근 시간에 맞춰 출근하는 게 한 달에 두세 번 밖에 안 됐고,

출장비 내역은 늘 부풀려서 올렸습니다.

생각을 멈춘 종식이가 다시 말을 꺼냈습니다.

​"그러면 아저씨는 행복하세요?"

"행복이라··

글쎄 늘 행복하면 재미없지 않나?

살다보면 행복이나 불행은 교대로찾아 오는 거잖아."

"그걸 누가 모르나요?"

"알기만 하면 안 되고 그걸 깨달아야지.

그러면 행복이 왔다고 해서,

또는불행이 날 찾아왔다고 해서

크게흔들릴 일이 없어. 답은 뻔한 거 아냐?

 

잠깐 불행하다고

영원히 불행할 거라고비관하지 않고,

잠깐 행복하다고 영원히 행복할 거라고

착각하지 않고살면 되는 거지.

비관하거나 착각하면 나만 괴로운 거지.

안 그래?"

"그럼 아저씨는

세상이 공평하다고생각하세요?"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공평하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사람에게는 불공평한 거지."

"그런 말이 어딨어요?"

"생각해 보게.

내가 이미 세상이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데 공평할 수 있겠어?"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아저씨의 손은 한 순간도

쉬지 않았습니다.

먼지를 털고, 낡은 뒤축을 뜯어내고,

사포질을 한 다음 새로 붙일 밑창에접착제를 바르고

불에 달구는 모든 과정이 아저씨의 구두약 묻은 손에 의해

차근차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자네는 직장 다니고 있나?"

아저씨가 물었습니다.

​"네, 작은 여행사에 다니고 있어요."

​"재미있나?"

​"재미있긴요.

죽지 못해 다니는 거죠."

​"그럼, 죽기 아니면 다니기네."

​"그렇게 되나요?"

​"죽는 것과 바꿀 정도로 선택했으면 열심히 다녀야지.

있는 그 자리에서열심히 해야 더 큰 물로 가는 거야.

열심히 안 사는 것도 버릇되는 거라네."

​"버릇이라니요?"

​"지금 있는 곳에서

열심히 일하지 않는사람들은 늘 그렇게 말하지.

​'지금은 열심히 살지 않지만 좋은 직장을구하거나

자기 사업을 시작하면 열심히할 거라고.'

그런데 그게 잘 안 돼.

한 곳에서도 열심히 살지 않은 사람은

다른 곳에서도 열심히 살지 못해. 버릇이 들었기 때문이야."

"아저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이보게, 내가 이 자리에서 구두를 닦은 지 20년이 넘었어.

이 버스정류장에서 출, 퇴근하는사람들은

적어도 1년에 한 번씩은여기에 오는데 그 사람들을 보면 변화가 느껴지거든.

일이 잘 풀리는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분명히 구별되지."

"하여튼 전 직장을 옮기고 싶어요."

​"내일 옮기더라도 오늘까진 그런 생각 하면 안 되네."

​"생각도 하면 안 되나요?"

​"일부러 할 필요는 없지."

​"왜요?"

"다른 사람들이

자네 생각을 모를 것 같지?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뭔가 달라지면 금방 눈치를 채거든.

아마 자네 직장상사들은 자네를 보면서 그럴 거야.

​'저놈 곧 그만둘 놈' 이라고. 그런데 자네한테 중요한 일을 시키겠나?"

종식이는 뭔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저씨가 계속 말을 이었습니다.

"자네가 지금 직장에서 일하면서 만난 사람들 말이야.

동료든 상사든거래처 직원이든 고객이든 언젠가는다 자네의 증인이 되는

사람들이야."

​"무슨 증인이요?"

​"세상은 좁네.

우연히라도 자네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그 사람들은 자네에대해 점수를 매길거야.

두렵지 않나?"

​"좀 걱정은 되네요."

​"그러니까 내일부터는

마음 고쳐먹어."

​"잘 안돼요."

​"일단 아침에 소풍가는 것처럼 기분좋게 일어나서 나가고,

어차피 할 일 웃으면서 일해.

머릿 속에 자꾸만 쥐꼬리 만한 월급 액수가 떠 오르면 지워 버리고,

월급쟁이 월급 다 거기서 거기야.

조금 더 받는다고 팔자 고치는 것도아니야.

기껏 차이가 나봐야 소형차와 중형차의 차이겠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리고 그 인상 좀 펴고 다니게.

젊은 사람이.

, 다 됐어. 이거 받아."

아저씨가 어느 새 수선한 구두를 내밀었습니다.

​순간 종식이는 시계를 올려다 봤습니다.

시계는 정확히 7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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