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이 있는 글방/좋은 시 215

2월ㅡ 오세영

2월ㅡ 오세영 '벌써'라는 말이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새해 맞이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 지나치지 말고 오늘은 뜰의 매화 가지를 살펴보아라. 항상 비어 있던 그 자리에 어느덧 벙글고 있는 꽃, 세계는 부르는 이름 앞에서만 존재를 드러내 밝힌다. 외출을 하려다 말고 돌아와 문득 털외투를 벗는 2월은 현상이 결코 본질일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달. '벌써'라는 말이 2월만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겨울 숲은 따뜻하다. =홍영철=

◈ 겨울 숲은 따뜻하다. =홍영철= 겨울 숲은 뜻밖에도 따뜻하다. 검은 나무들이 어깨를 맞대고 말없이 늘어서 있고 쉬지 않고 떠들며 부서지던 물들은 얼어붙어 있다. 깨어지다가 멈춘 돌멩이 썩어지다가 멈춘 낙엽이 막무가내로 움직이는 시간을 붙들어 놓고 있다. 지금 세상은 불빛 아래에서도 낡아가리라. 발이 시리거든 겨울 숲으로 가라. 흐르다가 문득 정지하고 싶은 그때.

메리 크리스마스 / 박목월

메리 크리스마스 / 박목월 크리스마스 카드에 눈이 왔다. 유리창을 동그랗게 문질러 놓고 오누이가 기다린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네 개의 샛파란 눈동자. 네 개의 샛파란 눈동자. ​참말로 눈이 왔다. 유리창을 동그랗게 문질러 놓고 오누이가 기다린다, 누굴 기다릴까. 네 개의 까만 눈동자. 네 개의 까만 눈동자. ​그런 날에 외딴집 굴뚝에는 감실감실 금빛 연기, 감실감실 보랏빛 연기,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너를 두고. / 나 태주

너를 두고. / 나 태주 세상에 와서 내가 하는 말 가운 데서 가장 고운 말을 너에게 들려 주고 싶다 세상에 와서 내가 가진 생각 가운데서 가장 예쁜 생각을 너에게 주고 싶다 세상에 와서 내가 할수 있는 표정 가운데 가장 좋은 표정을 너에게 보이고 싶다 이것이 내가 너를 사랑하는 진정한 이유 나 스스로 네 앞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이다.

문풍지 / 이진섭

문풍지 / 이진섭 덜커덕덜커덕 쿵~쿵~쿵~ 머리카락 흔들림 속에 소달구지 타고 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아련하다. 봄을 알리는 골목을 지나 얼음장 깨트린 차디찬 개울 다리를 건너 흐릿해진 안갯속의 손짓 하나로 사라진 님이 날 부른다. 넌지시 담쟁이를 뛰어넘어 보일 듯 말 듯 그림자는 날아가고 귓전에 드리우던 목소리는 더 이상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언제쯤 초연히 들려오려나 여름 지나 가을이 오면 찢어진 한지는 덮어씌우고 찬바람 다가올까 오늘내일 빈틈을 매운다.

보따리 열네 개 - 서홍관

보따리 열네 개 - 서홍관 일흔일곱이 되신 어머니는 고속버스 기사가 다시는 이렇게 싣지 말라고 지랄지랄하더라면서 화가 나셨다. 보따리 열네 개를 들고 오신 날. 어머니 상경하실 때는 아들 주시려고 동치미 국물과 김치와 깻잎과 무를 가져오시고 귀향하실 때는 집에 있는 개 주신다고 생선뼈와 고기찌꺼기를 담은 비닐봉지를 가져가신다.

낙엽 / 이생진

낙엽 / 이생진 한 장의 지폐보다 한 장의 낙엽이 아까울 때가 있다 그 때가 좋은 때다 그 때가 때묻지 않은 때다 낙엽은 울고 싶어하는 것을 울고 있기 때문이다 낙엽은 편지에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낙엽을 간직하는 사람은 사랑을 간직하는 사람 새로운 낙엽을 집을 줄 아는 사람은 기억을 새롭게 갖고 싶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