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이 있는 글방/좋은 시 223

보고 싶은 사람/문 정 희

보고 싶은 사람문 정 희아흔세 살 노모가 자리에 누운 지사흘째 되는 날가족들 서둘러 모였다어머니! 지금 누가 젤 보고 싶으세요?저희가 불러올게요아들이 먹먹한 목청으로 물었다노모의 입술이잠에서 깬 누에처럼잠시 꿈틀했다엄마!아흔세 살 아이가해 떨어지는 골목에서멀리 간 엄마를 찾고 있었다-『불교신문/문태준의 詩 이야기』2022.10.11.     노모에게도 보고 싶은 사람이 있고, 노모에게도 엄마가 있다. 위중한 노모는 엄마가 보고 싶다고 말한다. 마치 아이가 엄마를 부르는 것처럼 그 목소리로. 노모는 엄마의 존재를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리에 누워서도 가슴속에 묻어둔 엄마를 다시 불러내는 것일 테다. 보고 싶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의 혈관에 흐른다.   문정희 ..

함박눈 - 안재동

함박눈 - 안재동  슬픔이 눈처럼 쌓인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노여움이 눈처럼 쌓인다고도 말하고 싶지 않다  눈처럼 쌓인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오로지 그대를 향한 내 그리움만이다  함박눈 내리는 오늘 생각나는 단 한사람 그대  함박눈처럼 한없이 쌓이는 내 그리움을  복숭아 씨앗주머니 터트리듯 톡톡 지르밟으며 바지런히 오시오소서

넉넉한 마음 - 김재진

넉넉한 마음 - 김재진​고궁의 처마 끝을 싸고도는편안한 곡선 하나 가지고 싶다.​뾰족한 생각들 하나씩 내려놓고마침내 닳고닳아 모서리가 없어진냇가의 돌멩이처럼 둥글고 싶다.​지나온 길 문득 돌아보게 되는 순간부끄러움으로 구겨지지 않는정직한 주름살 몇 개 가지고 싶다.​삶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우리가 삶을 속이며 살아왔던어리석었던 날들 다 용서하며날카로운 빗금으로 부딪히는 너를달래고 어루만져 주고 싶다.[출처] 넉넉한 마음 - 김재진|작성자 복있는 사람

새해 인사 / 나태주

새해 인사 / 나태주 ​글쎄,해님과 달님을 삼백예순  다섯 개나 공짜로 받았지 뭡니까 ​그 위에 수없이 많은 별빛과 새소리와 구름과  그리고꽃과 물소리와 바람과 풀벌레 소리들을덤으로 받았지 뭡니까 ​이제, 또다시 삼백예순다섯 개의새로운 해님과 달님을공짜로 받을 차례입니다 그 위에 얼마나 더 많은 좋은 것들을 덤으로 받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잘 살면 되는 일입니다그 위에 더 무엇을 바라시겠습니까?

2월ㅡ 오세영

2월ㅡ 오세영 '벌써'라는 말이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새해 맞이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 지나치지 말고 오늘은 뜰의 매화 가지를 살펴보아라. 항상 비어 있던 그 자리에 어느덧 벙글고 있는 꽃, 세계는 부르는 이름 앞에서만 존재를 드러내 밝힌다. 외출을 하려다 말고 돌아와 문득 털외투를 벗는 2월은 현상이 결코 본질일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달. '벌써'라는 말이 2월만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겨울 숲은 따뜻하다. =홍영철=

◈ 겨울 숲은 따뜻하다. =홍영철= 겨울 숲은 뜻밖에도 따뜻하다. 검은 나무들이 어깨를 맞대고 말없이 늘어서 있고 쉬지 않고 떠들며 부서지던 물들은 얼어붙어 있다. 깨어지다가 멈춘 돌멩이 썩어지다가 멈춘 낙엽이 막무가내로 움직이는 시간을 붙들어 놓고 있다. 지금 세상은 불빛 아래에서도 낡아가리라. 발이 시리거든 겨울 숲으로 가라. 흐르다가 문득 정지하고 싶은 그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