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쓰레기 천국이다. 어디를 가나 발에 채이는 것이 바로 쓰레기이다. 게다가 분리 수거도 할 줄 모른다. 고속버스 휴게실의 쓰레기통을 쏟아서 그 쓰레기를 분리하여 보았더니 진짜 소각해야 할 쓰레기의 양이 1/6밖에 안 된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쓰레기통마다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씌어 있는데 왜 그것이 안 될까? 우리 한국 사람들은 다 문맹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우선 문맹퇴치운동을 범국민적으로 벌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공상을 해 보았다.
담배 꽁초를 아무데나 버렸다. 쓰레기를 크고 작고간에 무단 투기를 했다.
그러면 그 날 밤을 자고 나면 엄지 손가락 첫째 마디가 떨어져 없어졌다.
“어? 내 손가락 마디가 왜 없어졌지?”
“어제 육교 위에다 먹고 남은 빈 우유팩을 버렸잖니?”
“몰라요. 그렇다면 난 어떡해요?”
“ 앞으로 한 달간 쓰레기를 버리지 않으면 다시 손가락 마디가 붙을 거야.”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한 달이 지났다.
“ 야! 진짜 손가락 마디가 다시 붙었네!”
“ 한 달만 고생하면 되는데 뭘!”
하면서 담배 꽁초를 ‘휙’ 던졌다.
“어? 내 손가락 마디가 또 도망갔네!”
“또 한 달만 조심하면 다시 손가락이 붙겠지.”
그러자 어디선가 이런 말소리가 희미하여 들려왔다.
“이제는 안 돼. 한 번 기회를 줬으면 조심해야지. 이제부터 손가락 마디가 하나 없는 대로 일생 동안 살도록 해라.”
뒤늦게 후회를 한 들 무엇하겠는가.
“ 이 인간들아! 이것은 다 나의 실수다, 실수!
신의 음성이 귓전에서 떠나지 않는다.
불광천 산책로를 걸으면서 오늘도 분노를 참지 못했다. 해당 구청에서 산책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여러 가지 꽃들, 가지, 고추, 조롱박 등을 심어놓았다.
특히 조롱박은 덕을 만들어 줄기가 한참 뻗더니 드디어 조롱박이 열려 제법 보기 좋은 조롱박이 열려 있어서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주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 어느 날 아침에 지나다 보니까 그 조롱박이 없어졌다. 간밤에 누군가가 따가버린 것이다. 왜 그렇게 속이 쓰린지 가슴이 아팠다. 익지 않은 박은 보관도 안 된다. 마르면 쭈그러져 못쓰게 된다. 그런데 왜 그것을 따갔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신병 환자가 아니면 그럴 수가 없다.
고추나 가지도 마찬가지였다. 열자마자 훑어가버리까 고추나 가지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고추가 익어 빨간 모습을 드러낼 때가지 놔 둘 수는 없을까?
가지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 탐스런 모습을 볼 수는 없을까? 내가 공상한 것처럼 이런 사람은 자고 나면 팔 하나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잔인한 생각을 해 본다.
“ 이 인간들아! 이것은 다 나의 실수다, 실수!
어디선가 어렴풋이 신의 탄식 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았다.
두 사람 이상 모인 자리에서 나눈 대화를 들어보라. 전부 남의 이야기이다. 그것도 다 악담이요, 험담뿐이다. 학교의 선생님들도 예외일 수가 없다. 교장, 교감의 험담으로 시작되어 동료 교사로까지 번진다. 신나게 얘기하면 듣는 사람은 침을 고이면서까지 맞장구를 친다. 그 학교가 끝나면 이제 이웃 학교로까지 확대가 된다. 그래서 어느 학교 누구 하면 그저 줄줄이다. 어쩜 그렇게 남에 대해서 잘 아는 지 모르겠다.
이렇게 악담을 하는 교사는 그 날 저녁 자고 나면 입이 비뚤어졌으면 줗겠다. 비뚤어진 입의 모양을 어떻게 아이들에게 보일 수 있을까? 마스크라도 쓰고 수업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아이들은 수군거릴거야, 아마.
“우리 선생님은 어제 남의 험담을 해서 입이 비뚤어졌으니까 저렇게 감추고 수업을 하신거야, 그렇 지?”
이렇게 되면 학교 현장에는 마스크 쓰는 교사들이 판을 치고, 길거리나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마스크 부대뿐일 것이다.
그래도 한 번은 용서해 줘야 하지 않겠나? 일 주일 동안 덕담만 하면 입이 제대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러다가 다시 남의 흉을 보게 되면 일생 동안 비뚤어진 입으로 살아가도록 하여 후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한다면 이 땅에 남의 말, 남의 흉, 남의 험담이 사라진 살기 좋은 우리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망상을 또 다시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