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廣州)이씨 방

광주이씨(廣州李氏) 대종회 이해재(李海載) 회장

한실25시 2022. 4. 10. 22:14

  광주이씨(廣州李氏) 대종회 이해재(李海載) 회장

  조선 초기 최고의 문벌이었던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시조(始祖)는 신라 내물왕(奈勿王:제17대왕, 재위기간 356?402)때 내사령(內史令)을 지낸 이자성(李自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실성왕 15년(416) 눌지왕을 도와 그 자손에게 칠원성(漆原城)을 하사받아 자자손손(子子孫孫) 신라에서 벼슬을 세습해 오다 제56대 경순왕(敬順王)에 이르러, 신라가 고려(高麗) 태조 왕건에(936) 손국(遜國)하자 이에 불복(不服)하고 절의(節義)를 지켰으므로 고려 태조(太祖)가 강계(降階)하여 회안호장(淮安戶長)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본관(本貫)을 회안으로 칭관(稱貫)하다가 940년(태조23) 지명이 광주(廣州)로 개칭됨에 따라 광주를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는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광주이씨(廣州李氏)는 고려 말의 명현으로 알려진 둔촌(遁村)선생 이집(李集)을 중시조로 하여 문벌을 열었다. 그의 자손들은 소위 ‘삼자팔손구문과’ (세 자녀와 8명의 손자가 모두 문과에 합격)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조선시대 황금기인 성종시대에 8극 조정(克圭. 克培. 克堪. 克增. 克墩. 克均. 克基. 克堅)을 열어 그 문세가 해동의 제일이었으나, 성품이 강직하여 연산 시 무오 갑자 시 피화되어 멸문에 이르를 지경이었으나 서정쇄신의 기수 동고상공(俊慶) 임진왜란 시 간난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한음상공(德성)이 있으며, 유림에는 탄수선생(延慶), 석담선생(潤雨), 복암선생(基讓)이 있으며 임란 유공장군이 장렬공(潤德), 광남군(光岳) 병자호란 시 안주성에서 분사한 충민공(尙安)이 있다.

광주이씨(廣州李氏)는 선조들이 이룩한 찬란한 역사와 전통을 물려받아 해동 제일의 가문이란 긍지와 사명감으로 - <사인공파종회 이용발 도유사> <광릉부원군파종회 이병준 도유사> <문경공파종회 이승희 도유사> <광천부원군파종회 이두재 도유사> <광원군파종회 이영래 도유사> <좌의정공파종회 이명환 도유사> <참판공파종회 이용준 도유사> <좌통례공파종회 이지영 도유사> <문숙공파종회 이용준 도유사> <목사공파종회> - 10개 지파에서 둔촌(遁村)으로부터 비롯된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전통을 후대에까지 이어가고 있는 광주이씨대종회(廣州李氏大宗會) 이해재 회장과 관련유사들을 만나 이집(李集)의 가계(家系)가 조선시대 대표적인 거족(巨族)으로서의 명성을 쌓게 된 이야기를 들어본다.

○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중시조인 둔촌(遁村) 이집(李集)은

이집(李集)선생(1327-1387)의 초명은 원령(元齡), 자는 호연(浩然), 호는 둔촌(遁村)으로 이당(李唐)의 아들이십니다. 1347년(충목왕3년) 과거에 급제하시고. 1368년(공민왕17)에 신돈(辛頓)의 미움을 사서 생명의 위협을 받자 가족과 함께 영천으로 도피하셨습니다. 1371년(공민왕20) 신돈이 주살되자 개경으로 돌아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임명 되셨으나 곧 사직하시고, 여주 천령현(川寧縣)에서 지내시다가 광주에서 생을 마치신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재 둔촌동은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의 일부로서 고려 말(高麗 末)의 절신(節臣)이요 문장도학(文章道學)이 높은 둔촌공(集)이 사셨던 곳이라, 이집(李集)의 호인 둔촌(遁村)을 따서 지명을 둔촌(遁村)으로 하였습니다.

저서로 「둔촌유고(遁村遺稿)가 대표적이고 광주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 되었습니다.

둔촌(遁村)선생께서는 후손에게 “독서는 어버이 마음을 기쁘게 하느니. 시간을 아껴서 부지런히 공부하라” “늙어서 무능하면 공연히 후회만 하게 되노니, 머리 밑의 세월은 멈추지 않고 쏜살같이 흐르도다.” “자손에게 금을 광주리로 준다 해도, 경서 한권 가르치는 것만 못하느니라.” “이 말은 비록 쉬운 말이나, 너희들을 위해서 간곡히 일러둔다.”고 후손에게 일러 주셨습니다.

○ 광주이씨(廣州李氏)종회와 문화 유적

광주이씨(廣州李氏)종회는 사인공파종회/ 이용발 도유사. 광릉부원군파종회/ 이병준 도유사. 문경공파종회/ 이승희 도유사. 광천부원군파종회/ 이두재 도유사. 광원군파종회/ 이영래 도유사. 좌의정공파종회/ 이명환 도유사. 참판공파종회/ 이용준 도유사. 좌통례공파종회/ 이지영 도유사. 문숙공파종회/ 이용준 도유사. 목사공파종회의 10개지파로 이루어졌습니다.

문화유적으로는 둔촌 이집(李集/1327~1387, 고려 말 성리학자) 선생은 광주이씨 중시조로써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며, 묘역도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경기도 문화유적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석물(石物)의 예술적 가치가 있는 이윤덕 묘(성남시 향토유적 제7호), 추모재, 재실을 보호구역으로 지정 되었습니다. 성남시는 한 문중의 차원을 떠나, 성남시를 상징할 대표적 역사인물로 모시면서 문화원이 앞장서서, 둔촌선생의 높은 학덕(學德)과 인품(人品)을 추앙(推仰)하며, 역사의 뚜렷한 위인 상(偉人 像)을 드높이기 위해, 1993년 8월 2일 중원구 하대원동 둔촌 이 집 선생 묘역을 성남시 향토유적 제2호(묘역 1기)로, 2006년 3월 27일에는 둔촌 이 집의 후손(아들 탄천 이지직 외 8명)들의 묘역을 성남시 향토유적 제7호(분묘 9기, 석물 30점)로 연이어 향토유적으로 지정받았습니다. 2008년 1월 18일 심의위원으로부터 찬성을 얻어 둔촌 묘소 및 석물, 제실 장렬공(諱 潤德) 묘소 및 묘역도 문화유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 광주이씨(廣州李氏)대종회의 문화 사업은

광주이씨(廣州李氏) 발원지인 서울 강동구 일대를 축으로 둔촌생가 터, 둔굴, 정훈비, 둔촌약수, 옥천부원군 묘소(둔촌선조 딸. 진한국부인 남편이신 유창) 광릉부원군 묘소, 신도비각, 석탄공 유적, 구암정, 구암서원 등을 도보로 순회하는 거리 25km 도보 약 3시간 거리의 Green Way를 강동구 역점사업으로 약 329억 원을 들여 착공 계획입니다.

본 사업은 구암서원 복원과 연계하여 강동구와 본 종회와 밀접한 협의 하에 벌이는 사업으로 둔촌선생께서 신돈을 피하여 잠시 은둔하셨던 둔굴과 둔촌 약수터를 재정비하여 역사적 사실을 재조명함으로써 문화재적 가치를 창출하고 강동구의 명소로 만드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으며 대종회에서는 이곳을 우리 광주이씨의 성지로 가꾸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둔촌(遁村)선생의 유지 중 “독서는 어버이 마음을 기쁘게 하느니. 시간을 아껴서 부지런히 공부하라” “자손에게 금을 광주리로 준다 해도, 경서 한권 가르치는 것만 못하느니라.”는 유지를 받들기 위해 <둔촌 청소년 문학상 백일장>. <둔촌 한시, 시조시백일장>, <유소년 퀴즈대회>도 개최하고 있습니다. 특히 성남시의 국제자매도시인 중국 심양 시에서 <둔촌백일장>개최하는 등 국내외를 막론하고 둔촌문화 교류사업과 기념사업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성남시문화원 내에 부설기관으로 ‘둔촌연구회’를 설치해 광주이씨 문중 후손뿐만 아니라 광주시민과 청소년들의 도의선양(道義宣揚) 교육, 홍보 등을 전개해 오고 있습니다.

○ 최고의 명문(名門) 가(家). 훌륭한 대성(大姓)의 의미

둔촌(遁村) 이집(李集)은 고려말의 성리학자입니다. 둔촌(遁村)의 뜻은 항상 곧고 지절이 있으며, 국운이 기울어가는 난세에서도 정치를 바로 잡기위한 직언을 아끼지 않았던 선비였습니다. 신돈이라는 승려에게 집중된 무소불위의 권력이 세상을 주름잡는 시기에 둔촌은 날카로운 비판을 통하여 바른 정치를 할 것을 주문하였다가 목숨까지 위태로울 때가 있었습니다.

목은 이색(李穡).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李崇仁) 등과 교우하였으며, 신돈의 미움을 받게 되자 은둔생활을 하였다. 광주를 관향으로 하는 광주이씨는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188명, 무과 급제자 350명, 정승 5명, 문형(대제학) 2명, 청백리 5명, 공신 11명 등 수많은 인물을 배출한 명문가로, 광주이씨의 중시조인 둔촌(遁村) 이 집 선생은 우리 역사 속에서, 충절과 효행으로 대표가 될 주인공이며, 일제시대와 현대의 도덕교과서에 그의 행적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일본 등에서도 둔촌에 대한 각종 연구논문, 학술회의, 토론회가 왕성히 추진되고 있으며, ‘용인의 포은 정몽주, 남양주의 다산 정약용, 성남시는 둔촌 이 집 ’이 있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광주이씨(廣州李氏)대종회 이해재 회장은 기축년 새해 인사에서 “올해의 설날은 기쁨이 넘치니, 고향에서 가족과 웃으며 마주하니 문 닫고 있는 것은 찾아오는 사람이 미워서가 아니라 허옇게 쉰 귀밑머리 보이기 부끄러워서였네” 둔촌 할아버지께서 설날에 지으신 첩자 시를 인용하면서 “스스로의 처신에 은인자중 하자며” 20만여 광주이씨 가족들에게 당부하였다.

이해재 회장은 1983년 부천시장 재직 시절에 지역예술문화의 사각지대인 부천을 현재의 종합예술문화도시로 성장하게 된 원동력인 ‘복사골 예술제’를 기획한 장본인이다. 토박이 거주민보다 외지인이 대거 이주하여 신 도시화 되면서 “옛 문화의 정취를 후대에 물려줄 기회를 잃어가는 것이 아쉬워 부천시 문화 예술계 대표들과 수차례 장시간 마라톤 회의를 하면서 ‘복사골종합 예술제’를 만들었다는” 이해재 회장은 “지역문화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는 ‘복사골종합 예술제’를 볼 때마다 자부심과 긍지를 느낀다고” 했다.

1986년 ‘성남시장’, 1995년 ‘경기도지사’ 2000년 ‘월드컵수원경기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 등 전직(前職)의 경험을 살려 광주이씨(廣州李氏) 문중의 숙원사업인 구암서원과 둔촌생가 복원과 둔촌문화행사 사업을 활성화 시켜 광주이씨(廣州李氏) 후손은 물론 모두가 참여 할 수 있는 향토문화로 승화 시키려 하고 있다.

                                      출처 : The People(http://www.ithepeopl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