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향 재배
접시에는 까서 잘 손질한 파인애풀 2개, 망고 3개, 망고스틴 5개가 담겨져 있다. 전날 야시장에서 산 열대과일이다. 저녁에 간식으로 먹고 싶었지만 쓸데가 있어 냉장고에 보관하였다.
오늘은 우리 민족의 대명절인 설날이다. 을미년을 시작하는 첫날이다. 그런데 차례상에는 달랑 열대과일 한 접시뿐이다. 접시도 없어서 전날 밤 리조트 식당에서 사정사정하여 한 개를 겨우 빌렸던 것이다. 설날에 과일 한 접시를 조상에게 드리는 불효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음식을 정성껏 준비해서 차례를 지내야 하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큰 죄를 범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여행복 차림으로 과일 한 접시 올려놓고 북향 재배를 올렸다.
‘용서하십시오. 걸게 차려놓고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그렇게 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그 옛날에는 드시기 어려웠던 열대 과일을 바치니 이걸 드시고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을 속으로 되뇌이면서 북쪽을 향하여 정중하게 절을 두 번 올렸다. 설날을 이렇게 타국에서 보낸 것이 처음이라 마음이 편하지 못하였다. 친척들이 모여 북적거려야만 할 설날 아침인데 너무 쓸쓸하기만 했다. 구정을 전후로 해서 괜한 짓을 하지 않았나 하는 자책감까지 들었다.
“아버님! 허락도 없이 해외여행 예약을 해 놓았어요.”
“무슨 해외여행이냐? 돈도 없는데.”
“그런데 좀 싼 비용으로 예약을 하느라고 구정을 전후로 날짜를 잡았습니다.”
많이 망서렸다. 일생 동안 추석이나 설날 차례를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는데 이번 구정은 여행 때문에 접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꺼림직하였다. 이 문제 때문에 집사람과 가벼운 말다툼까지 있었다.
“장남이 모처럼 해외 여행을 보내준다고 하는데 그걸 거부한다고요?”
“설 차례도 안 지내고 편안하게 해외 여행을 하는 것이 자손된 도리냐고요?”
그 순간에 자기네들이 차례를 책임지고 잘 지낼테이니 잘 다녀오시라는 장남의 전화를 받고 할 수 없이 마음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마음은 가볍지 않았다.
추운 겨울에 반바지 차림으로 다닐 수 있는 태국 푸켓으로 날아갔다. 6시간의 40분의 비행 시간이 약간은 지루한 느낌이 들었다. 역시 태국은 관광 수입으로 살아가는 나라란 것을 공항에서 쉽게 알 수 있었다. 공항이 완전히 사람으로 꽉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식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는데 역시나였다. 나는 원래 향에 약하다. 어려서는 깻잎도 그 냄새 때문에 못 먹었는데 요즘은 카레까지 먹게 되었지만 역시 음식에서 냄새가 나는 것은 싫다.
아침에는 리조트에서 식사를 하는데 별로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이 없었다. 한 번은 태국 뷔페 식당에 갔는데 먹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닭다리가 국물 속에 있어서 건져 왔는데 향료 때문에 먹을 수가 없었다. 다른 음식은 뭘로 조리했는지 조차도 알 수가 없어서 먹는 것을 포기하고 열대과일로 배를 채울 수밖에 없었다. 여행 중에 한국음식을 두 번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잔뜩 기대를 했었는데 역시나였다. 무한정 삼겹살집에 갔었는데 맛이 영 아니었고 또 한 번은 등갈비찜이었는데 달기만 하고 맛은 내 입맛에 맞지 않았다. 내가 나고 자란 땅에서 우리 음식을 먹으면서 사는 것이 큰 행복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신토불이’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마음에 와 닿았다. 설날이니까 떡국도 먹고 갖가지 음식도 먹을 수 있는데 사서 고생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분은 포장된 김치와 김을 싸 가지고 오신 분도 있었다. 그 분들도 나처럼 향료에 약한 분들이 아닌가 싶어 이해가 되었다. 음식은 제대로 먹지 못한 불편함이 있었지만 그래도 열대 과일을 많이 먹을 수 있어서 참 좋았다.
태국에 머무는 동안 반바지, 남방셔츠를 입고 활보할 수 있어서 좋았다. 피피섬에 가서 해수욕도 즐길 수 있었다. 코끼리도 타 모았다. 집집마다 야자수와 바나나 나무가 많은 이유도 알게 되었다. 열대 지방이니까 뱀이 많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 모양이다. 그 나무의 진을 뱀이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뱀이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준다고 한다. 전봇대의 모양도 원이 아니라 사각형으로 되어 있는 것도 뱀이 타고 올라갈 수 없게 한 것이라고 한다.
구정을 쇄지 못한 여행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내내 마음이 무거웠고 그 죄책감은 여행 기간 내내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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