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佛(시불) 王維왕유
詩佛(시불) 王維(왕유;700∼761)는 성당 때 시인으로 자가 摩詰(마힐)이다. 그는 시뿐만 아니라 그림과 글씨 및 음악 등 다방면에 걸쳐 매우 뛰어나, 살아 생전에 남종화의 원조와 당대의 명필 및 비파의 명연주자 등 다채로운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왕유는 62세로 죽을 때까지 武后(무후)·中宗(중종)·睿宗(예종)·玄宗(현종)·肅宗(숙종) 등 무려 다섯 왕을 섬기며 살았을 만큼 곡절 많은 삶을 영위하였다.
왕유가 활동했던 성당에는 도교가 크게 흥성하긴 했지만, 유불도 삼교가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활발히 성행하였다. 왕유의 사상적 변화를 살펴보면 당시의 이 같은 분위기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다시 말해 소년기에는 유가적 삶을 목표로 과거에 급제하려 노력하였고, 청장년에 이르러서는 도가에 심취한다. 그러나 만년의 왕유는 선종에 완전히 귀의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안록산의 난을 겪으면서 불교에 귀의함은 물론 현실에 나타나는 현상들을 佛理(불리)로써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비록 왕유가 만년에 선종에 귀의하기는 했지만, 그에게 있어 선종은 모태신앙과 같은 것이었으며 생활의 일부였다. 이처럼 왕유가 선종을 생활화하면서 몸소 그것을 실천하는 데에는 크게 세 가지 요인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첫째, 왕유는 어려서부터 죽는 그날까지 불교의 영향권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불교에 심취되어 있었다. 왕유의 어머니 최씨는 대조선사에게서 30여 년 간 사사를 받을 정도로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왕유는 750년 모친 최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지은 '請施莊爲寺表(청시장위사표)'에서 그 같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신의 亡母(망모), 고 博陵縣君(박릉현군) 최씨는 일찍이 대조선사의 문하에서 삼십여 년 사사하셨습니다. 신의 어미는 거친 옷과 채식, 계율을 지키며 참선하셨습니다. 산림에 즐거이 머물며 寂靜(적정)을 구하는 일에 뜻을 두셨습니다.
(臣亡母故博陵縣君崔氏, 師事大照禪師三十餘歲, 褐衣蔬食, 持戒安禪, 樂住山林志求寂靜.)
(신망모고박릉현군최씨, 사사대조선사삼십여세, 갈의소식, 지계안선, 낙주산림지구적정.)
왕유의 어머니 최씨가 사사한 대조선사는 북종 神秀(신수)의 嗣法弟子(사법제자)인 普寂(보적;651∼739)의 시호로, 최씨는 북종선의 보적선사에게 선의 가르침을 받아 중국여인들이 바라마지 않는 비단옷조차 몸에 걸치지 않고 거친 옷과 채식 그리고 엄격한 계율을 지키며 한평생을 보냈다.
이러한 모친 최씨의 불교적 삶은 왕유에게 선종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선종의 분위기에 심취케 하는 환경을 조성하였다. 나아가 선종적 가정환경은 그가 {유마경}의 주인공 維摩詰(유마힐)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字(자)를 摩詰(마힐)이라 하며, 훗날 아무런 욕심을 갖지 않고 경전을 읽고 참선에만 몰두케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둘째, 성당의 사회적 상황에 따른 왕유 자신의 신변 변화이다. 문학·음악·회화 등에 다재다능했던 왕유는 개원 9년(721) 진사라는 벼슬로 첫 관리생활을 시작하지만 당시의 권력투쟁에 휘말려 몇 차례의 좌천생활을 경험하면서 세계관의 변화를 겪는다.
특히 755년 당 왕조의 부패에 분개한 안록산이 난을 일으키자 현종은 사천성으로 피난하고 수도 장안은 반란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장안에 남아 있던 왕유는 반란군에 의해 菩提寺(보제사)에 구금된다.
왕유는 약물을 복용하고 이질병을 가장했으나 반란군측은 그를 낙양으로 이송하여 給事中(급사중) 벼슬을 강요하였다. 이때의 부역은 왕유에게 굴욕으로 환원되어 輞川莊(망천장)에 은거하며 시와 그림 및 선에 몰두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 왕유와 선사들의 활발한 교류이다. 성당의 지주계급과 지식인들이 대부분 선을 애호하고 선종 승려들과 밀접한 교류를 맺고 있음은 당시의 일반적인 유행으로, 왕유가 활동하던 시대는 '남방에는 혜능, 북방에는 신수'(南能北秀;남능북수)라고 불릴 정도로 두 분파가 선의 정통성을 놓고 투쟁하던 무렵이다.
왕유는 당시 남북종 최고의 선사 가운데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교류하였다. 대표적으로 북종선의 선사로는 普寂(보적)과 義福(의복)을 비롯하여 淨覺·惠澄(정각·혜징) 등이며, 남종선의 선사로는 神會(신회)와 瑗公(원공)을 비롯하여 璿禪師·元崇(선선사·원숭) 등이다.
실제 이 시기에 왕유는 비록 조정 관직을 수행하기는 했으나, 장안에서 날마다 십여 명의 승려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며 그들과 심오한 철리의 토론을 즐겼다. 또 그의 서재에는 아무것도 없고 오직 茶具·藥 ·經案·繩床(다구·약 ·경안·승상)뿐이었고, 퇴궐 후에는 향을 피우고 앉아 선경을 誦讀(송독)할 정도로 선종적인 삶을 실천하였다.
왕유는 선의 체험을 그대로 詩化했던 시인으로서, 중국시가사상 선시를 문학적으로 가장 잘 체현한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래서 왕유와 동시대의 시인이었던 苑咸(원함)은 '酬王維(수왕유)'에서 "왕형은 당대의 詩匠(시장), 또 선리에 정통하였다"(當代詩匠;당대시장, 又精禪理;우정선리)고 하였다. 그의 시 가운데 선사상이 농후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鹿柴(녹시)'·'木蘭柴(목란시)'·'鳥鳴澗(조명간)'·'竹里館(죽리관)'·'辛夷塢(신이오)'·'過香積寺(과향적사)' 등을 들 수 있다. 먼저 '鹿柴(녹시)'를 살펴보자.
鹿柴 녹시
空山不見人 공산불견인 빈 산에 사람 보이지 않고
但聞人語響 단문인어향 말소리만 들리네.
返景入深林 반경입심림 반사되는 그림자 깊은 숲에 들어와
復照靑苔上 복조청태상 다시 푸른 이끼 위에 비치고 있네.
시인은 순간적인 직관으로 빈 산의 석양 무렵 깊은 숲 속에 비쳐 드는 한 줄기 저녁 햇살에 반사되는 이끼의 푸른빛과 들릴 듯 말 듯한 사람의 음성을 담담한 심정으로 묘사하였다.
이 시에서 삼라만상은 저물어 가는 저녁 햇살 아래서 비로소 그 숨겨진 모습을 드러낸다. 실로 한낮의 작열하던 태양이 그 열기를 거두어 갈 때의 고요함(寂;적) 속에서 비춤(照;조)은 사물의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고, 이때 자연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더욱 밝아진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수동적으로만 바라보던 자연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윽고 저녁 어스름이 숲 속에 깔리면, 시인은 숲 속에 조용히 앉아 순간순간 변하는 자연현상들이 모두 허망한 환각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시의 특징은 단지 20자의 글자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幽人(유인)'의 음성과 깊은 숲 속에 스며드는 한 줄기의 저녁 햇살을 연결시킴으로써 텅 빈 산 속에 단지 사람 소리의 메아리만 들려 와 더욱 쓸쓸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왕유가 추구하고자 했던, 세속의 먼지와 시끄러움을 멀리하는 空(공)이며 또한 寂(적)의 경지이다.
또한 이 시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 숨겨져 있어 잘 파악되지 않는 경치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런 현상에 대해 청대의 趙殿最(조전최)는 그의 동생 趙殿成(조전성)이 쓴 {王右丞集注(왕우승집주)}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승은 선리에 정통하여 그의 시를 아무리 뒤집어 보아도 그 진실을 보기 어렵다. 그는 中道(중도)의 진리를 깊이 체득하였으니 '空外(공외)의 소리'요 '수중의 그림자'라. 그 향기는 과일의 즙과 같고 그 열매는 참외와 같이 달며 잘 익은 술과 같다. 使人(사인)이 찾아도 그 틈을 찾을 수 없으며 좇아가고자 해도 갈 수 없으니 그의 자취가 空(공)할 뿐이다. 오직 홀로 그 종에 도달했도다.
'鹿柴(녹시)'에서 잘 나타나듯이 왕유의 인식, 즉 자연이란 한 순간에 변하는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선종의 유심주의적 이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선종의 색공 관념은 세계가 궁극적으로 객관존재의 과정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일체 사물의 현상은 '寂滅(적멸)'에 귀결된다고 설명한다. 왕유의 유심주의적 인식이 잘 드러나 있는 '木蘭柴(목란시)'를 보자.
木蘭柴목란시
秋山斂餘照추산렴여조 가을 산 남은 빛을 거둬들이고
飛鳥逐前侶비조축전려 날던 새들도 짝을 지어 돌아가네
彩翠時分明채취시분명 푸른 햇살에 빛나던 산 빛마저도
夕嵐無處所석람무처소 가을 저녁 어스름에 사라지는구나
이 시에서 시인은 예리한 관찰을 통해, 석양의 남은 빛이 가을 산에서 사라지고 하늘을 날던 새들도 모두 둥지로 돌아간 뒤 한때 푸른 햇살에 빛나던 산 빛이 사라지는 가을의 고요한 저녁풍경을 묘사하였다.
시인은 여기에서 '鹿柴(녹시)'와 마찬가지로 모든 자연계의 生滅變化(생멸변화)를 자신의 직관 속에 응집시키고 있다. 또 시인은 모든 아름다운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夢幻(몽환)과 같은 美(미)의 허망부실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미(아름다움) 현상에 대한 허망부실의 인식 밑바탕에는 선의 色空(색공)사상이 농후하게 깔려 있다.
이는 {열반경}에서 "마치 허공을 나는 새처럼,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如鳥飛空;여조비공, 迹不可尋;적불가심)는 것이나, {화엄경}에서 "제법적멸을 깨달은 자, 마치 허공을 나는 새처럼, 그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了知諸法寂滅(요지제법적멸), 如鳥飛空(여조비공), 無有迹(무유적)」라는 구절들이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청대의 徐增(서증)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마힐은 불교의 가르침에 정통했으며, 그가 쓴 모든 문장은 붓다의 가르침에 부합된다.
(摩詰精大雄氏之學, 篇章詞句, 皆合聖敎.)
(마힐정대웅씨지학, 편장사구, 개합성교.)
이것은 왕유 시의 핵심을 명쾌하게 지시하고 있다.
辛夷塢 신이오
木末芙蓉花 목말부용화 나무 끝에 연꽃
山中發紅萼 산중발홍악 산 속에 붉게 피었네
澗戶寂無人 간호적무인 개울 옆 인적 없는 집에
紛紛開且落 분분개차락 어지러이 피었다 지네
이 시는 언뜻 보면 목련 핀 산 속의 움직임(動)을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시인은 이 시에서처럼 대지에 내리는 가랑비의 모습, 들녘에 쌓이는 낙화, 깊은 계곡에서 우는 새, 희미한 등불 주변에 모여드는 곤충들, 미풍에 흔들리는 실버들 등을 즐겨 묘사했는데, 이것들은 한결같이 '動中靜(동중정)' 혹은 '靜中動(정중동)'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시인이 표출한 '움직임'은 자연계의 운동변화와 생기발랄한 움직임이 아니다. 그것은 시인이 말하는 공허한 聚散生滅(취산생멸)일 뿐이며 감각적으로도 고립된 단편적 영상으로, 시인은 단지 자신의 虛融淡泊(허융담박)한 정서를 자연의 고요한 動景(동경)에 일치시키고 있을 뿐이다. 실제 시인이 묘사하고자 하였던 '動景(동경)'의 목적은 취산생멸하는 현상에 있지 않다.
그것은 동과 정이 서로 교차되어 나타나면서 사람들의 시각에 보여지는 모든 변화 현상이 환상에 지나지 않으며, 동시에 들려지는 모든 변화 현상도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에 있다. 특히 모든 변화 현상도 환상에 불과하다는 허망부실과 무상변화는 최종적으로 '시 속에 그림이 있다'(詩中有畵;시중유화)는 왕유의 시만이 자아낼 수 있는 독특한 경지를 창출하였다.
鳥鳴澗 조명간
人閒桂花落 인한계화락 사람 한적한데 계화 떨어지고
夜靜春山空 야정춘산공 밤은 고요하고 봄 산은 텅 비어 있네
月出驚山鳥 월출경산조 달 떠오르니 산새 놀라
時鳴春澗中 시명춘간중 봄 시내에서 간간이 지저귀는구나
이 시는 봄날 한적한 산 속에서의 정취를 잘 그려내고 있다. 시의 구성을 살펴보면, 1·2구에는 깊은 밤 고요한 산중의 정경 속에서 계수나무 꽃이 조용히 떨어지고 있을 뿐 어떠한 새 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 고요함(靜;정)의 극치를 나타내고 있다. 3구에서는 고요하던 봄 밤의 산중에 갑자기 달이 떠오르자 산새가 놀라서 우는 모습이, 4구에서는 놀란 산새의 울음소리가 광대한 밤하늘의 적막을 흔들고 있다.
이 시의 표현수법은 '辛夷塢(신이오)'와 같다. 시인은 매우 空寂(공적)한 의경을 그린 다음 산중의 개울에서 들려 오는 새 우는 소리로써 '움직임'(動;동)을 묘사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시인이 묘사하는 새 우는 소리는 시인이 승인하고 있는 객관 사물의 운동 변화의 결과는 아니다. 즉 시인에게는 새 우는 소리가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산골의 개울에서 우는 새 소리를 형상화하여 내재된 이념을 표현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이 시에는 선가에서 흔히 말하는 '정중동'의 妙理(묘리)가 시적인 흥취로 승화되어 있으며, 작품 전체가 閒靜(한정)하면서도 言外之意(언외지의)의 그윽한 맛이 풍긴다.
특히 이 시는 남조 梁代(양대)의 시인 王籍(왕적)의 "매미 우는 소리에 숲은 더욱 고요하고, 새 우는 소리에 산은 더욱 그윽하다"「蟬塞林逾靜(선색림유정), 鳥鳴山更幽(조명산경유)」를 연상케 한다. 단지 왕유는 왕적과 달리 매미 소리가 아닌 새 소리를 통해 역설적으로 深山密林(심산밀림)의 조용하고 그윽한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명대 胡應麟(호응린)은 그의 {詩 (시 )}에서, '鳥鳴澗(조명간)'을 '辛夷塢(신이오)'와 더불어 '入禪(입선)'의 작품이라고 하면서, "읽으면 자신과 세계를 모두 잊어버리고, 만가지 생각이 모두 고요해진다"「讀之身世兩忘(독지신세양망), 萬念皆寂(만념개적)」고 하였다.
竹里館 죽리관
獨坐幽篁裏 독좌유황리 대숲에 홀로 앉아
彈琴復長嘯 탄금복장소 거문고 뜯고 길게 소리내어 읊네
深林人不知 심림인부지 깊은 숲 사람들 알지 못하니
明月來相照 명월래상조 밝은 달이 와 서로 비추고 있네
이 시는 세간과는 멀리 떨어진 깊숙한 대숲에서 느낀 천연의 즐거움을 묘사하였다. 시인은 홀로 마음껏 거문고를 타다 이따금씩 길게 휘파람을 불어 보는데, 그윽하고 고요한 대숲이라 그의 존재를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고, 단지 저 하늘의 명월만이 댓잎 사이로 그 은은한 빛을 비춰 내려와 동무가 되어 준다. 이처럼 시인은 대숲 속의 그윽함을 감상하는 한편 내심의 고독을 체득하는 가운데 고요함과 적막함의 즐거움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淸幽寂靜(청유적정)의 극치요, 하나의 완전한 공적의 경지임에 틀림없다. 이 시에서 避世脫俗的(피세탈속적)이고 物外超然(물외초연)의 사상을 마음껏 느낄 수 있다.
'竹里館(죽리관)'을 보면 대숲 속에서 홀로 거문고를 타고 휘파람을 부는데, 오직 명월만이 '知音(지음)'하여 깊은 숲 속으로 스며들어와 자신을 비추니, 시인은 마치 온갖 심사를 단지 저 명월에게만 털어놓을 수 있는 듯하다. 그래서 청대 唐汝詢(당여순)은 {唐詩解(당시해)}에서 이 시에 대해 "임간의 정취를 뭇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데, 명월만이 밝게 비추어 주니 흡사 그 뜻을 아는 듯하다"「林間之趣(임간지취), 人不易知(인불이지). 明月相照(명월상조), 似若會意(사약회의)」라고 평했다.
過香積寺 과향적사
不知香積寺 부지향적사 알지도 못하고 향적사 찾아가다
數里入雲峯 수리입운봉 구름 깊은 곳에 들었네
古木無人逕 고목무인경 고목 속으로 길은 사라졌는데
深山何處鐘 심산하처종 어디선가 종소리 들려 오네
泉聲煙危石 천성연위석 개울물은 괴이한 돌부리에 울리고
日色冷靑松 일색랭청송 햇빛은 소나무에 차갑게 빛나고 있네
薄暮空潭曲 박모공담곡 해질녘 고요한 연못가에 앉아
安禪制毒龍 안선제독룡 禪定에 들어 번뇌를 잠재우리
이 시는 장안 부근 終南山(종남산)에 있는 香積寺(향적사)의 경치를 그리고 있는데, 천연의 妙境(묘경)이 실로 탈속적 정취에 깊이 젖어들게 한다. 이 시는 첫 구에 '알지도 못하고'(不知;불지)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는데, 이것은 시인의 자연스럽고도 허심한 마음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나아가 이것은 '어디선가'(何處;하처)와 '사람 없는데'(無人;무인)와 서로 호응하면서 하늘을 가릴 정도의 고목으로 가득 찬 산림 속에 사람의 발자취 하나 없고 홀연히 절의 종소리가 들려 오는 향적사의 그윽한 적막감을 창출하고 있다. 게다가 기암괴석 사이로 '흐느끼는' 산 개울 소리, 푸른 솔 숲 사이로 비쳐드는 '차가운' 햇빛 등은 울창함 속에 정적이 감도는 산색을 이루면서 더욱 향적사의 깊고 그윽하며 적막한 경지를 형상화하는 것이다.
특히 이 시의 마지막 2구에서 시인은 돌연 禪語(선어)를 혼용하여 세속초탈적 寓意(우의)를 한층 드러내고 있다. 다시 말해 毒龍(독룡)은 여기에서 온갖 '헛된 생각'이나 '번뇌망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시인은 '靜慮(정려)'의 최적 조건인 그윽하고 고요 적막한 산사에서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무념무상의 참선 삼매경에 빠져들어 현실의 일체를 잊고 세속적 망념을 제압하기를 동경하고 있다.
淸溪 청계
淸冬見遠山 청동견원산 맑은 겨울날 먼 산 바라보니
積雪凝蒼翠 적설응창취 쌓인 눈에 푸른빛이 어렸어라
皓然出東琳 호연출동림 나 호연히 동림을 나왔으니
發我遺世意 발아유세의 세속에 뜻을 두지 않네
이 시에서 왕유는 자신이 좋아하는 자연에 주관적 감정을 불어넣어 맑게 흐르는 시냇물에 자신의 '한담'한 사상감정을 반영시키고 있다. 특히 시인은 겨울날 먼 산을 바라보며 쌓인 눈에 푸른빛이 감도는 것을 보고 갑자기 세속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시적 자아를 발견한다. 이처럼 깨달음을 통한 정신적 해방은 세상을 초월하고자 하는 염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로 선종은 현세에서의 내심의 자아해탈을 중시하였으며, 특히 일상생활의 자잘한 일들 가운데서 계시를 얻고, 대자연의 감상과 도야 속에서 초월적 깨달음을 획득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그래서 송대 葛立方(갈입방)은 왕유의 산수시에 대해 "마음은 物外(물외)와 융합되어 있으며 도는 현미와 계합되어 있다"「心融物外(심융물외), 道契玄微(도계현미)」고 평하였다.
지금까지 '鹿柴(녹시)'·'木蘭柴(목란시)'·'鳥鳴澗(조명간)'·'竹里館(죽리관)'·'辛夷塢(신이오)'·'過香積寺(과향적사)' ·'淸溪(청계)' 등을 살펴보았다. 왕유 시의 가장 큰 장점은 자연의 이미지를 섬세하게 포착, 응결하여 動靜一如(동정일여)의 시계로 환원시키는 한편,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닌 인생의 원숙한 통찰을 담고 있는 데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원숙한 통찰력은 선종의 접촉을 통해서 체득한 內心自證(내심자증)의 心法(심법)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선종의 유심주의적 관념이 그 바탕을 굳건히 이룬다.
劉大杰(유대걸)이 왕유 시를 평하기를 "畵筆(화필)과 禪理(선리) 그리고 詩情(시정)이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다"고 지적했는데, 왕유 시에 대한 선종의 영향을 한마디로 명쾌하게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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