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마르트 언덕의 사랑 /
40. 노랑머리 천사
승빈은 삼층 손님방으로 올라갔습니다. 창밖에는 달이 서편으로 기울어져 가고 파리 시내는 가로 등이 황금빛 줄 그림을 이리저리 그리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달은 산에서 떠서 높이 뜬 채 산 너머로 숨는데 여기 달은 지평선에서 떠올라 지평선으로 내려갑니다.
달을 바라보는 동안 엄마 아빠 생각이 가득히 밀려왔습니다.
“엄마, 보고 싶어. 아빠, 제가 잘못했어요.”
이렇게 중얼거리며 가만히 눈을 감았습니다.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엄마 목소리가 맘속에 쟁쟁하고 아빠의 웃음소리도 들려왔습니다. 내일은 만나게 된다고 하지만 엄마 아빠가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따라다니던 노랑머리가 그렇게 부끄러웠는데 그 렌이 보호해 주는 천사일 줄은 몰랐습니다. 사귄 시간은 짧지만 아주 오래 사귄 사이처럼 승빈 가슴에 파란 눈이 새겨졌습니다.
‘렌은 자고 있겠지. 나는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데…….’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아빠 얼굴로 지워지고 다시 노랑머리 렌의 웃는 얼굴이 가립니다. 렌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파리 뒷골목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도 모릅니다.
“고마워 렌!”
감사의 말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렌이 아니었으면 경찰서에 갇혀서 굶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리저리 사람들 사이를 헤매었지만 모두가 말이 안 통하여 사람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말을 하는 렌을 만났을 때는 마치 캄캄한 동굴을 헤매다가 빛을 만난 것 같았습니다. 아무하고도 말이 안 통할 때는 벙어리나 짐승이 모여 있는 것 같았습니다.
프랑스 사람이 보기에 승빈은 벙어리 같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답답한 속에서 우리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는 순간은 죽었다가 살아난 기분이었습니다.
승빈은 침대에 올라 벌렁 누웠습니다. 종일 마음고생을 하고 헤맨 몸에 피로가 안개처럼 전신을 덮었습니다. 엄마 아빠를 생각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었습니다.
한편 그 시간 렌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볼 수 없었던 잘생긴 얼굴, 착한 눈빛, 어리지만 어른스런 귀티…….
렌은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습니다.
‘내일 빈이 부모님을 만나면 떠나겠지. 그럼 헤어져야 해? 싫어…….’
빈과 헤어진다는 것이 슬퍼졌습니다. 렌은 싫어 싫어하면서 침대에 얼굴을 묻고 뒹굴었습니다.
밤은 깊어 가는데 남의 속도 모르는 달은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며 벙글벙글 웃고 있었습니다.
렌은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책상 앞으로 갔습니다. 겨우 하루도 안 되는 반나절을 보내면서 나눈 이야기가 책을 읽는 것처럼 떠오릅니다. 렌은 오늘 하루 일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입니다.
렌은 예쁜 편지지를 꺼내어 한글로 편지를 썼습니다.
어쩌자는 것도 아니고 무슨 말을 해야 마음이 바라는 대로 쓸 수 있는지도 모르는 채 가슴에서 나오는 대로 종이에다 풀어 놓았습니다. 몇 번 썼다가 지우고 다른 종이에다 써보고 그래도 마음을 다 옮기기에는 부족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리한 것을 얌전하게 접어 시집 속에 찔러 넣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몽마르트 언덕의 사랑 / 41. 만남
승빈은 깊은 잠을 자고 눈을 떴습니다. 창밖은 온 세상이 푸른빛으로 가득하고 동쪽 지평선 구름 사이로 해가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아아, 잘 잤다!”
팔을 벌려 기지개를 켜고 맑은 하늘을 향해 그렇게 말했습니다. 밖에서 렌이 노크를 했습니다.
“빈, 아직도 자?”
승빈은 문을 열고 나서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어느새 렌의 아빠까지 와 계셨습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너도 잘 잤니?”
“네.”
말은 우리말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지만 렌의 아빠는 키가 크고 노란 머리에 안경까지 쓴 완전한 서양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말을 그렇게 잘하는 것이 신기하고 존경스러웠습니다. 렌이 말했습니다.
“늦잠꾸러기님, 세수하고 아침 식사하세요, 호호호.”
아래층에는 벌써 상이 차려져 있었습니다. 렌 엄마가 사랑스런 눈으로 말했습니다.
“잘 잤어? 오늘은 좋은 날이야. 엄마 아빠를 만나는 날!”
렌도 새처럼 맑은 목소리로 한 마디 했습니다.
“축하, 축하! 아빠 엄마 상봉!”
렌 아빠가 딸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았습니다.
“네가 진짜 한국 사람이 되었구나. 상봉이라는 어려운 말도 다 할 줄 알고.”
“저는 프랑스말보다 한국말을 더 잘해요.”
“언제 그렇게 배웠지?”
“학교에선 친구들한테 배우고 집에서는 동화책에서 배웠어. 내가 아무리 잘하면 뭘 해 써 먹지도 못하게 되었는데.”
엄마가 말했습니다.
“왜 못 쓰니? 프랑스에도 한국어 학교가 생기고 대학에도 한국어학과가 있는데.”
렌이 밝게 응답했습니다.
“내가 이래봬도 한국어 선생 하라면 어디서든지 자신 있어, 호호호.”
“그래, 넌 한국어 선생이 되면 좋을 거다. 너만큼 한국어를 잘할 수 있는 사람은 프랑스 안에 없을 테니까. 아니 독일이나 네덜란드에도 없을걸.”
승빈이 말했습니다.
“맞아요, 네덜란드에도 한국어 학교가 있고 대학에도 한국어학과가 있지만 렌처럼 말을 잘하는 사람은 없어요.”
렌이 신이 났습니다.
“그렇지 빈! 나 한국어 짱이지?”
“짱, 짱이라고? 응, 짱이야 쨩!”
이 말에 온 가족이 웃음보를 터뜨렸습니다. 승빈도 말해 놓고 모처럼 소리 내어 웃었습니다. 렌이 귀여운 목소리로 승빈을 불렀습니다.
“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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